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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날다'를 연재합니다. (3-4 모르는 놈은 끝까지 모른다)
  • 문현숙 기자
  • 등록 2022-11-18 10: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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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뻔뻔하고 무지한 수컷들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3-4 모르는 놈은 끝까지 모른다


봇물 터진 미투 물결에 대해 가해자들은 대체로 부인으로 버티다 폭로가 잇따르면 마지못해 ‘불미스러운 사건’, ‘죄스러운 일’ 등으로 두루뭉술하게 인정하거나 아예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연출가 이윤택은 사과하는 기자 회견에 앞서 이를 연습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미리 준비된 연극 대사를 외는 듯한 그에게 사과의 진정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피해자에게 백배사죄한다고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가? 그는 자신의 행동을 ‘추악한 욕망’ 탓으로 호도했다. “한참 공연되고 있는 춤에서 춤과 무용수를 분리할 수 있느냐”고 예이츠가 말했다. 욕망과 욕망을 느끼고 드러내는 주체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관계는 했지만 성폭행은 아니었다”며 강하게 부인하는 대목에선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그는 “안마에 대해서는 지금 제 잘못을 통감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남자건 여자건 다 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자기 편한 대로’의 분노 유발 사과법이다. 도대체 웬 사족과 변명이 그리 많을까? 이걸 보고 새삼 느낀다. 올바른 젠더 교육과 함께 제대로 사과하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우 조민기도 처음에는 “확인 안 된 구설”, “떠도는 소문”이라며 강력 부인했다. 그러나 폭로가 계속되자 “가슴으로 연기하라고 가슴을 손으로 툭 쳤을 뿐이다.”, “수고했다며 안아줬다. 나는 격려였다”고 말을 바꿨다. 상습 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고은 시인은 외신을 통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계속 집필을 할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인간문화재 하용부는 자신의 성폭력에 대해 구설수 수준의 “성추문”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적, 사회적 명예가 실추되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크게 불리하지 않다는 법률가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성폭력 범죄의 경우엔 입증도 쉽지 않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것과 이를 입증해 가해자를 벌하는 데는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어떤 가해자들은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말한다.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말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스스로 ‘대의적인 통 큰 결정을 내리는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겠다는 건지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빠져있다. 힘들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직업, 생계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해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논점을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가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직접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태도를 보여야 사과 자체의 의미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희롱은 권력 관계가 수반된 폭력의 한 형태이다. 실제 2016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 피해 경험 조사 결과 여성의 52%가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는 직장상사·고용주(65.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이한 점은 성희롱을 당한 장소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곳이 ‘음식점 또는 카페’(37.9%)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버젓이 성희롱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성희롱, 성추행을 남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인식과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서지현 검사 역시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박재동은 결혼식 주례사를 부탁하러 온 예비 신부를 성추행했다. 이 문제들의 근저에는 성희롱을 가볍게 여기는 남성 중심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 있다. 조직 내 문화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용인하는 분위기이면 구성원들은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따라가는 경향이 강해진다. 여성에 대한 성희롱을 농담 수준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만연돼 있기 때문에 남성들 스스로 성(性)을 가볍게 여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무심코 내뱉고 행동하는 성희롱을 상대방 여성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지 못하기에 이 같은 문제가 산발적으로 불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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