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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날다'를 연재합니다. ( 5-2 네 잘못이 아니야!)
  • 문현숙 기자
  • 등록 2023-03-17 09: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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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는 것을 멈출 때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5-2 네 잘못이 아니야!


심리학 용어 중에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단어가 있다.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된 것인데 남편이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는 아내에게 “아냐.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며 아내를 세뇌시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내는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하고 조정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써, 정서적 폭력이며 정신적 학대의 일종이다. 이것은 주로 연인이나 배우자,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유순한 성품이나 공감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그의 말을 믿고 따르려 노력할 때부터 가해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본인이 의식을 했든 안했든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가스라이터’가 될 위험성이 높다.


가스라이팅의 덫에 빠진 피해자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인지능력과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라고 끊임없이 자문하게 된다. 결국 자존감을 상실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더욱 정서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가해자의 말 한마디에 따라 자책감과 죄의식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잘못이 없는데도 잘못한 것 같고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어 그 사람의 말을 믿게 되는 병리적 심리 상태’를 ‘가스등 이펙트’라 한다.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은 “네가 날 무시하니까 내가 화나서 때리는 거잖아, 날 자극하는 네가 나쁜 거야”라며 책임을 아내 탓으로 돌린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터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매 맞는 아내는 “내가 정말 잘못해서 맞는 걸 거야”라고 인정하게 된다.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매 맞는 아내 신드롬’이다.


형법상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형법 제303조,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0조)’에서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실상의 지배력을 행사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업무나 고용관계 등으로 자신의 보호·감독을 받는 사람을 성폭행한 이들에게 적용되는 혐의다. 이때의 ‘위력’이란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피해자의 성적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서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불문하고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가해자가 물리적 힘이나 강압을 동원하지 않고도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통제하는 위력에 의한 가스라이팅이 인정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피해자 비난 문화’도 가스라이팅에 속한다. 성추행이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늦은 시간까지 함께 술 마신 것은 너도 좋아서 그런 거 아니냐”, “남자 집에 따라가는 것은 다 허락한 것 아니냐”, “정말 싫었으면 죽어라고 저항했어야지” 등등의 말로 피해자를 비난한다. “난 여자지만 정말 여자가 이해 안 간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한 번 성폭행을 당했다면 바로 사표 던지고 나오든 고소하든 할 것이지, 계속 있으면서 두 번 세 번 더 당했다는 게 대체 뭔 소리인가? 한 번이었다면 이해하겠는데 여러 번 성폭행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폭행당했으면 바로 신고를 해야지 수 개월간 성폭행 당했다는 게 말이 되냐. 바보 천치도 아니고… 싫으면 왜 거절을 못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김지은씨의 JTBC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그렇다면 김지은 씨는 왜 처음 성폭행을 당했을 때 신고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상습적인 피해를 당한 것일까? 김지은 씨는 인터뷰에서 “(지사님이)다 잊어라, 항상 잊으라는 얘기를 저한테 했기 때문에 내가 잊어야 하는구나, 잊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저한테는 있는 기억이지만 없는 기억으로 살아가려고 그렇게 다 도려내고 도려내고,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주의상담연구회 강문순 이사는 이것을 가스라이팅의 한 사례로 분석한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불신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믿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경험한 피해가 사실일까, 피해이긴 한 걸까 끝없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판례들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피해자 관점에서 느끼는 두려움에 집중한다. 피해자가 두려움 때문에 상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응할 수밖에 없다면 자발적 동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 관점이란 피해자의 두려움이 주관적인 것이고 합리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 책임’이라는 사회 통념과 편견이 일상화되어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범죄 피해 여성들은 먼저 자기 검열을 하고 자신을 탓하기 쉽다. “여자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한국의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가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자각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반면 한국 남성들은 아직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성희롱을 정상적이고 당연한 행동으로 착각한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남자는 여성편력을 훈장처럼 자랑해도 별 흉이 되지 않는 반면 여성에겐 종종 ‘걸레’란 적대적이고 비하적인 낙인이 찍힌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피해자는 죄가 없다. 한국사회가 잘못된 통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미투의 미래가 달려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훗날 한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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