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투 캠페인을 보는 불편한 시선들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6-3 미투와 진영 논리
진보의 대표 주자격인 방송인 김어준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문재인 정부와 진보적 인사를 겨냥한 공작(?)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음모론을 ‘예언’의 형식으로 제기했다. “섹스, 주목도가 높은 좋은 소재”인 미투 운동이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를 분열시킬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난 여론이 일자 김어준은 “미투 운동을 공작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 거지 미투 운동이 곧 공작이라고 한 건 아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진보적 정부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진보적 인사가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어도 방어하거나 드러나지 않게 감춰줘야 한다는 말인가? 성폭력 피해자들은 정치적 공작을 목적으로 피해 사실을 굳이 밝히려 한다는 것인가? 피해자들의 인권 문제에 무슨 여야나 진보 보수가 따로 있을까? 특히 평소 인권, 정의를 목소리 높여 외치던 진보 진영이 아니었는가? 그들이 말하는 인권 속에 ‘여성’은 빠져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 대목이다.
참여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 수석이었던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미국에서 미투 운동은 위력과 위계에 의한 반복적이고 상습적인 성폭행과 성추행을 폭로하는 데에서 시작됐다. 상대의 권력이 너무 커 조용히 법적으로 해서는 이길 수 없기에 다수의 여성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실명 공개로 한 남성의 추행을 연대 고발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론재판을 하게 된 것이다. 법치 국가에서 여론 재판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에 한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미투는 공인의 성적 추문이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조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모처럼 피해자 여성의 용기 있는 폭로가 사이비 미투에 의해 오염되기 시작했다”면서 “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일회적인 성추행(으로 느꼈던 행위), 그것도 당시 권력이 없는 사람의 미수 행위, 여러 여성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이 한 번 경험한 성추행이라 여겨지는 행위에 대한 폭로는 미투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 ‘Me only’일 뿐”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위계와 위력에 의한 상습적 성범죄만이 국민적 공감을 얻는 미투로 자리 잡을 수 있고 나머지는 사이비(?) 미투라는 것이다.
조교수가 “미투와 사이비 미투를 구분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언론에 지적한 부분에 관해서는 물론 익명에 기대 증거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생활을 폭로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와 경종을 울린 것이라 볼 여지도 있다. 언론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비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러나 “상습적인 성폭력에 관한 폭로만이 진정한 미투 운동이고 일회적인 성폭력에 대한 폭로는 사이비 미투”라며 성범죄 횟수로 죄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안 된다. 상습적이든 일회성이든 성폭력은 일벌백계할 범죄일 뿐이다.
“미국 경제를 역대 최고의 호황으로 이끈 클린턴은 사생활이 도덕적이어서 훌륭한 대통령이었나?”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경제만 잘 이끌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기억하건대 과거 대통령 재직 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반응도 결코 관대하진 않았다. 진영 논리에 빠져 피해자들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들쑤시는 2차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자유한국당 성폭력근절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인 박순자 의원은 과거 당내 성폭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래도 보수 진영인 한국당은 성도덕에서 보수적”이라며 “우리에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나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일들”이며 성폭력은 아니었다는 취지로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술자리의 터치는 성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제1야당의 성폭력 개념 부재를 여지없이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미투 운동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고은이나 이윤택처럼 과거 대통령과 친분 깊은 진보 인사들의 성범죄가 드러난 것을 대통령의 성의식과 연결 지어 부각시키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우리 당 국회의원을 음해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소위 미투 운동이 좌파 문화 권력의 추악함만 폭로되는 부메랑으로 갈 줄 저들이 알았겠느냐”면서 당에서 주최한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해 “미투 운동을 좀 더 가열하게 해서 좌파들이 좀 더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투 운동에 대한 이러한 음모론이나 선거 공학적 접근이야말로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미투 운동의 불씨를 꺼뜨리고 왜곡하는 위험을 암시하는 것이다.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여야 5당 대표의 농담 따먹기식 발언 역시 문제가 많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안희정 사건 딱 터지니까 밖에서는 임종석이 기획했다고 하더라고…”라며 ‘음모론’을 꺼내들었고 임종석 비서실장은 “대표님이 무사하니 저도 무사해야죠”라고 농담조로 응수했다. “대한민국 남성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것”이라는 말에 “저는 당당하다”고 답한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에게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유승민 대표님은 빼 드린다. 사모님이 저랑 경북여고 동창이라서…”라며 웃었다. 미투 운동을 가벼운 농담거리로 치환해버리는 이들 정치인들에게 피해 여성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힘없는 피해자들의 외침을 제대로 듣고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를 위한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응당 정치권이 할 일이다. 한국 여자 90%이상이 성추행, 성희롱 경험이 있다. 이처럼 성폭력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주권자를 대리하는 정치인들은 이 사실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미투는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서지현 검사의 사례에서 보듯 사회적 지위와도 무관하다. 젠더 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미투 운동의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배제·억압이라는 거대한 모순이 놓여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적폐는 있다. 미투 운동이 제대로 성공하는 것이 진정한 적폐 청산의 길이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한 이상, 이 움직임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일회성 열풍에 그치거나 극단적인 성 대결로 가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의 진지한 제도적·문화적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때다. 미투 운동을 이용해 어느 한 쪽을 공격하거나 진영 대결로 바라보며 정치적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시도는 피해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은 권력적 갑을 관계와 성차별적 사회 구조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다. 그럼에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커녕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고 특정 세력이나 반대 진영의 공격 수단으로 삼는 발상을 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