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성평등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그날까지
송문희 저자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현 정치평론가 / 전략문화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최근 한 전도유망한(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정치 지도자의 성폭행 사건은 많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앞에서는 페미니즘이나 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뒤에서는 어떻게 아무 죄책감도 없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80년대 진보 운동은 “페미니즘 넘어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성평등’이란 가치는 빠져 있었다. 인권·민주주의·평등 이런 가치에서도 여성이 배제되어 온 것이다. ‘진보적 젊은 남자’도 이런 가치를 체화하지 못했다.
남성적인 조직 문화나 남성 중심적인 위계 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것들이 이젠 시대가 바뀌고 가치관이 변화함으로써 범죄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많은 남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동안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고 약자를 대해 온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할 때이다.
남자들은 권력 있는 자에게 순종하고 권력 없는 자에게 권력을 부리면서 남성성을 구축해 왔다. 그 가운데 절대적 타자로서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의 모든 공적 영역에서 남성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사기업에서 의사 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여성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 안에서 “찌질한 놈”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 남자들도 발버둥 치며 살고 있다. 이들이 여성을 동료나 사업 파트너로 인정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한 엘리트 교수는 “내가 만난 여자라고는 집에 있는 마누라와 딸, 술집 여자밖에 없다”고 말한다. 동등한 시민권을 가진 존재로서 여성의 존재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모임의 총무를 함께 맡은 남자 총무와 의견이 달라 논쟁이 있었는데 일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어디 여자가 주장을 하고 나대느냐?”라며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남자들의 수준에 어이가 없었던 경험이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이들은 여자의 거절을 “No”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대가 좋아하든 말든 찍어 넘어뜨리겠다는 나의 불굴의 의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거나 무시당한다.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서구에서는 성폭력 개념에서 핵심적인 게 ‘성차별‘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치 철학자 아이리스 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조적 부정의’속에 놓인 사람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구조를 돌아가게 하는 직접적인 수행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상 속에 녹아든 구조 속에서 행위자들은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사실 조차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가볍게 소비한다. 자신도 모르게 성희롱이나 성추행 범죄의 동조자·묵인자로 가해자가 됐던 경험들을 성찰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인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때가 왔다.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성차별적인 언행이나 문화적 관행을 개선할 수 있도록 일상 속에서 자기 행동들을 규율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영역의 책무이기도 하다. 성폭력과 여성 차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정치 영역에서의 성평등의 실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교육부는 성차별적인 교육체계를 바꾸고 인권과 성평등 교육을 해야 한다. 고용 노동부는 성희롱 문제와 성별 임금 격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청와대에는 왜 여성 비서관 직책이 없는가?
‘성 평등 민주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지금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성폭력 피해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희롱·성폭력 등은 중대한 인권 침해이지만 범죄라는 인식조차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했던 차별과 동조, 침묵의 구조가 더 큰 문제이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와 인식을 바꿔내지 않는 한 성폭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은 막을 내렸다. 침묵을 넘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거대한 연대의 물결에 의식 있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은 성차별에 찬성합니까”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NO”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 ‘성평등 민주주의’의 출발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평등 민주주의’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한 우리 삶의 변화로 연결되어 우리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다.